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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사역|사람들의 참된 치유를 위한 자유정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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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용일 목사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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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고전이 된 밀로스 포먼 감독의 이 영화를 조직의 횡포에 항거하는 인간의 자유의지 발현의 시각으로 볼 수 있다. 자유주의자 맥머피는 ‘방종’만을 가지고 뻐꾸기 둥지(=정신병원의 상징) 안으로 날아갔는데 그러면 맥머피의 자유가 정신병 환자들을 진정으로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인가? 물론 정신병원이라는 조직 속에 있는 대표적 캐릭터인 관료주의자는 규칙과 규제를 강조하고 늘 일과대로 진행하는 성실만으로 환자들을 제대로 치료할 수는 없다. 그럼 가장 바람직한 치료(정신질환자를 통해 대변되는 현대인들을 향한)는 무엇인가? 영화 속에서 그 해답의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오레곤 주 주립 정신병원의 간호사 렛취드는 병원에서 가장 우수한 직원으로 평가받고 있다. 호흡법과 스트레칭부터 시작하여 집단 토론을 통한 사고력의 함양과 정신 치료법은 그녀가 확신을 가지고 있는 정신질환 치료의 메커니즘을 잘 보여준다. 정해진 시간에 약을 먹이고 동료 환자에게 자기 약을 주는 못된 환자를 잡아내는 단속을 통해 치료의 기강을 잡으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노름의 판돈이 되어버린 담배의 배급을 중단하여 버릇을 고치려는 방법도 중요한 치료의 한 방법이다. 그런데 집단 토론치료는 결국 고함소리와 싸움으로 끝나고 환자는 혀 속에 약을 감추었다가 뱉어버린다.

그렇다고 렛취드 간호사가 사명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나름대로 확신을 가지고 환자들의 치료를 위한 통제를 선호하면서 ‘가짜 환자’ 맥머피를 교도소로 돌려보낼지 결정하는 회의에서도 “남에게 책임을 전가시키지 않도록 맥머피를 병원에 두는 것이 더 좋겠다”고 말한다. 이런 렛취드의 모습은 자신의 직업에 대한 지나친 확신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전형적인 직업인의 고집을 보여준다. 이런 확신은 야간 근무자인 흑인 간호조무사와 대조되면서도 비슷한 면이 있다. 그는 맥머피가 마련한 술과 여자의 꼬임에 빠지면서도 간호사실을 난장판을 만들려는 환자들에게 “여긴 병원이야 병원, 신성한 내 직장이야.”라고 말한다.

그러면 병원 사람들에게 무엇이 부족했는가? 그것을 교도소의 노역이 힘들어 편하게 지내려고 자청해 정신병원으로 들어온 맥머피라는 철모르는 ‘새’가 잘 보여준다. 우선 맥은 사람대접을 요구했다. 일과표를 조금만 조정하면 월드 시리즈 야구를 볼 수 있다면서 다수결이라는 규칙을 동원해 저지하려는 렛취드를 끝내 이겨버리고 만다. 또한 낚싯배를 훔쳐 타고 나가서 환자들이 얼빠진 얼간이가 아니라 낚시꾼임을 보여준 일은 그들도 사람임을 잘 보여준 멋진 쾌거였다. 커다란 고기들을 가슴에 안고 항구로 돌아오는 그들의 멋진 모습은 속이 시원하고 감동적이다. 그들도 사람임을 맥머피는 보여주려고 했다.

또한 맥은 사람들이 다 포기해버린 추장 프레데렉슨에게 농구를 가르친다. 몸짓과 발짓으로 결국 그가 농구를 하게 만든다. 말도 안 되는 헛일이라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렛취드에게 보기 좋은 한방을 먹이며 추장의 큰 키를 활용해 농구를 하게 하여 자신감을 심어준다. 결국 추장은 입을 연다. 그는 말을 못 듣고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안 듣는 척, 못 하는 척했던 것이다. 뛰어난 추장이었던 아버지를 술로 파멸하게 한 미국 정부의 흉계에 맞서 생존의 전략을 채택한 것이 바로 언어장애자 행세였다. 그러나 그도 결국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

열여덟 명의 환자들 중 중증인 몇 명만 빼고 나머지 대부분이 스스로 원해서 그 병원에 있는 ‘자원 환자들’인 점에 경악하는 맥머피는 환자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해서 무진 애를 쓴다. 절망적으로 이렇게 외치기도 한다. “모두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아니야, 아니라고! 길거리를 버젓이 활보하는 악당들보단 당신들이 덜 미쳤다고.” 그리고 맥머피는 아무도 들어 올릴 수 없다고 하는 무거운 세면대를 들어 올리려고 용을 쓴다. 물론 실패했으나 중요한 말을 한다. “그래도 나는 시도해봤잖아!” 아무도 해본 적이 없으나 그는 시도해보고 나서 되지 않는 것을 알았다!

추장이 가고 싶다는 캐나다로 도망가려고 했던 밤, ‘광란의 파티’ 이후 소심하던 빌리는 자살하고 맥머피는 뇌수술을 받아서 정신 못 차리는 무력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자 추장은 맥머피를 안락사 시키고 세면대를 들어 올려 창살에 던져 뚫린 구멍으로 자유로운 땅을 향해 달려간다. 추장은 ‘뻐꾸기 둥지 위로 탈출해 날아간 새’가 되었다.

진정한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문제를 진지하게 그리고 있다는 평을 받는 이 고전 영화는 오늘 우리 시대를 살아가면서 크리스천 직업인들이 어떤 자세로 사람들을 대해야 결국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고 그들의 영혼을 치유할 수 있는지 단서를 제공해 준다. 자기 연인을 자신감 회복의 상대로 빌리에게 내어준 맥머피의 방종이나 그 사실을 자기 친구인 빌리의 어머니에게 이야기하겠다는 일종의 협박으로 반성을 촉구하는 렛취드의 경직된 태도도 결국 빌리를 살려내지는 못했다. 자신감을 회복하기는커녕 결국 더 큰 두려움으로 자살하고 말았다. 서로의 방법을 이해하고 보완하는 장치로 인정하는 태도가 아쉽다. 좋은 관계나 대화가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알고 있으면서도 시도해보지 않는 렛취드의 한계와 병원의 치료를 부인하는 맥머피의 태도는 양극단이다.

눈을 뜨고 입을 벌린 가장 자유로워 보이는 표정으로 안락사 당한 맥머피의 얼굴이 희망적인 표정인 것만은 아니다. 맥머피의 얼굴을 베개로 누르기 전, “널 이렇게 두고 갈 수는 없어. 나와 함께 가는 거야. 가자”라고 말하던 추장의 말이 희망적이지는 않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이고 자신감이고 치유의 끝이라고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 영화의 끝은 오히려 좀 아쉽다. 조직의 통제와 억압이라는 현실 속에서 바람직한 방법, 환자들을 치유하고 개선시키는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할 수 있었다면 훨씬 더 마음 편안하고 희망적인 결론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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