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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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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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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을 보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이 이루시는 뜻은 엄청나게 다른 것을 경험할 때가 많다.
예수님께서 33년 생애 가운데 3년 동안 공생애기간 중에 희생과 사랑으로 섬김과 나눔으로 육적치유와 내적치유, 영적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셨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나귀를 타고 입성하게 되었다. 세상의 왕의 행진은 호화찬란하고 권위와 위엄을 갖추어야 한다. 다스리는 자는 권위가 있고 위엄이 있어야 하고 두려운 존재로 군림해야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망하고 대망하면서 기다리는 메시야는 권위 있고 엄위한 모습으로 당당하게 예루살렘으로 들어 올 것을 꿈꾸고 환상을 그리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모든 민중은 기대와 흥분으로 들떠 있었다. 주님은 군림하고 힘으로 다스리는 왕이 아니다. 군마를 타고 칼을 치켜든 전쟁터를 주름잡는 왕이 아니다. 어린 나귀 새끼를 탄 평화의 왕이시다.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섬기고 사랑하는 평화의 왕이시다.
필자도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나귀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주님을 닮고자 했다. 군림하거나 힘으로 다스리는 자가 아니라 애정과 살핌과 눈물로 섬기고 사랑하는 목사의 상을 늘 생각하며 살았다. 백성이나 성도의 기대는 군림하고 힘을 다스리는 당 같은 지도자를 바랬으나 주님의 원하심은 나귀타신 모습을 우리에게 보이시고 그와 같이 살기를 원하셨다.
백성들을 ‘호산나 찬송 하리로다’라고 환영하였다. 그러나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십자가에서 죄인으로 죽어야 하는 길이었다. 얼마가 지나서 민중들은 지상들이 생각했던 당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기대했던 만큼 예수님을 열광적으로 규탄했다. 지독하리만큼 배신했다. ‘유대인의 왕이라’고 재판을 할 때 절대로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고 했다. 유대인의 당이 아니라고 할 때 실망한 백성은 예수를 고발하고 당시 사회를 시끄럽게 했던 “바라바”라는 사형수를 예수 대신 놓아주고 예수는 사형시키라는 데모를 했다(마27:16~18:21)
필자도 섬기던 교회에서 간교하고 무례한 자들에 의해 이전 고난과 아픔을 당했다. 빌라도는 예수가 아무런 죄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벌 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군중들의 데모가 두려워서 십자가에 내어 주었다.

마침내 사랑이 증오로 변했다. 양이 사자로 변했다. 환영의 민중은 독사의 무리로 변했다. 목적이 다를 때 , 기대가 다를 때, 요구가 다를 때 인간은 언제나 무서운 폭도로 변할 수 있다. 끝내 예수님은 민중의 요구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멸망을 영생으로, 죄인을 의인이 되게 하시는 십자가의 도를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그가 진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의 최상의 증거요, 공의의 최대증거이며 풍성한 축복의 경이이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이 아니면 보좌에 앉으신 주님도 될 수 없다. 역사의 변화는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에 의해 바뀌게 된다. 십자가 지는 삶을 회피하지 말고, 주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되자. 십자가 후에 먼 훗날 보좌에 앉게 해주실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하면서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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