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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이야기|덜렁대는 줄 알았는데 아주 치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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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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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10단 자전거와 비슷하다.
대부분 사람은 평생 쓰지 않는 기어가 있다.
-찰스 슐츠-

나는 1995년 청와대 경제비서실 산하 경제행정규제 완화작업단 총괄과장으로 일했다.
최근 들어 청와대의 청소부부터 수석까지 부패의 고리에 얽혀들어 청와대를 보는 국민의 시각은 부정적이지만 청와대는 명실상부하게 대한민국의 인재가 몰려 있는 곳이고 일 처리 하나하나가 정확해야 함은 물론이다.
당시 경제수석은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였던 박재윤 씨였다. 경제 비서관은 경제기획원 국장 시절 ‘재미있는 경제이야기’란 베스트셀러를 써 화재를 불러 일으켰고 교육부 차관을 지낸 바 있는 경제기획원 선배 이영탁씨와 국무총리까지 지낸 한덕수 씨였다.
경제규제완화 실무를 총괄하면서 관련 세미나 개최 계획을 수립할 때의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한다.

박재윤 수석은 빈틈이 조금도 없는 매우 정확하고 꼼꼼한 분이었다.
보고서 중에 세미콜론(;)의 위치가 단어와 단어 사이의 중간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왼쪽으로 1/3정도 붙고, 오른쪽에 2/3정도 여백을 남겨 놓아야 맞는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세콜론이 반대쪽으로 치우치거나 가운데 있기만 해도 보고서를 재작성할 정도였다.
잘못하여 오타 하나만 나와도 큰일이겠구나 싶어 철저하게 살펴보고 세미나 개최에 대한 계획, 주제, 사회 내용뿐 아니라 안내, 주차장 이용계획까지 철저하게 준비하였다.
그런데 이영탁 비서관이 직접 경제수석에게 보고하라고 발을 빼버렸다.
나는 철저하게 준비했다. 보고서의 논리도 말이 되도록 여러번 수정하고 물론 오타 하나도 없게 했다. 그리고 예상 질문까지 들어 그 질문에 대한 대답도 완벽하게 준비했다. 보고하는 동안 질문을 10번 이상했다. 나는 바로바로 명확하게 대답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과연 어떤 코멘트를 할 것인가 긴장했다. 박 수석이 입을 열었다.

“송 과장이 잘 준비한 것 같구먼, 덜렁대는 줄 알았는데 아주 치밀해” 치밀한 완벽주의자 박재윤 수석으로부터 이러한 평가를 받기란 매우 드문 일이었다. 무슨 꼬투리를 잡힐까 조마조마했는데 의외의 칭찬을 들으니 힘이 났다. 아무리 꼼꼼하고 세심한 상사라 하더라도 잘한 것에는 칭찬도 해줄 수 있는 마음이 상관의 미덕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 후 혼자 야근하는데 박 수석이 부하들과 식사하라며 10만원짜리 수표 석장을 세어서 주기도 했다.
드리어 세미나 날이 다가왔다. 다는 세미나에서 읽을 대통령 축사를 미리 써서 보고 했다. 대통령 축하는 한 단어, 한 구절마다 함축하는 뜻을 두고 많은 논란을 벌이는 만큼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부분이다. 그리고 그 생간의 의미에도 많은 사람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했다. 사소한 것이라도 확대하여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항상 도사리고 있었다.
축사 중에 참석한 이물들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조차 참석자의 희비를 엇갈리게 하는 역할을 했다. 세미나에서 읽혀질 축사를 쓰며 많은 귀빈의 직명(교수, 언론인, 기업인)만을 거론하고 실명은 밝히질 않았다. 다만, 세미나의 장소를 제공한 김상하 대한상의회장은 실명을 거론하여 특히 감사하다고 써 놓았다.
김영삼 대통령이 주위 사람을 고려하며 축사를 하는가, 아니면 생각없이 그대로 읽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의 축사에서는 내가 쓴대로 김상하 회장에 대한 감사와 칭찬이 쏟아졌다. 청와대 비서실에서 경제기획원으로 돌아온 나는 공보담당관을 맡았다. 이곳에서는 그동안의 행정경험을 창의적으로 발휘하는 능력을 키운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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