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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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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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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 석종
(창 2 : 8 - 15 ; 눅 23 : 43)

창 2 : 1 - 25의 에댄 낙원생활은 현재와 미래에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이 ‘하늘의 기쁨’을 누리는 것과 연결 된다 (눅 23 : 43 ; 사 51 : 3 ; 고후 12 : 4 ; 계 2 : 7 등 참조). 특히 예수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회개하는 행악자가 낙원의 약속을 받는다(눅 23 : 40 - 42, 43). 예수님이 말씀하신 ‘파라데이소스’( παράδεισος , 낙원)는 창 2 : 8의 에댄 낙원과 같은 의미이다( 70 인역, 불가타 역). 창 2 - 3 장의 에댄 낙원(樂園)은 고대 바빌론에도 없는 매우 예술성이 뛰어나며, 인간 심리학적인 전개는 ‘현대적’인 성격을 나타낸다.
그의 주제는 인간 아담과 땅(대지)를 결합시켰다. 남자와 여자의 육적인 상호 종속과 친화성을 중요하게 본다(창 3 : 7, 20). 타락 후에 남녀는 성(性)의 신비를 알았다. 남자에게 그의 반려자는 ‘여자’이며 ‘하와’(모든 산자의 어머니)이다. 인간이 사는 땅은 샘물과 강물이 흐르며, 거기에 각종 과일이 풍요롭다(창 2 : 6, 9, 10,), 그리고 인간이 경작하는 낙원에는 먹는 과일과 주인의 금령(禁令)과 형벌의 규례도 있다(창 2 : 15, 16 - 17). 또 교리적인 선입견 없이 구체적인 인간 생활 모습을 전개한다. 인간 내면의 수치심(창 2 : 25 ; 3 : 7)이 묘사되지만, 명확한 개념보다는 불가해한 보편적인 신비를 나타낸다. 에댄 낙원 이야기는 ‘낙원 안에서’가 아니라 ‘낙원 밖에서’ 낙원 이후의 현재의 인간의 삶 속의 혼란, 불화와 고통, 갈등, 죄, 죽음을 말하고 있다. 에댄 낙원 안에서 노동은 인간의 실패로 고통이 되었고, 여성의 존재와 어머니의 행복은 근심과 고통으로 음울해진다. 즉 모든 고통은 죄에서 왔다고 주장한다(창 3). 이런 혼란, 고통과 죄는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욕망에서 나왔으며, 일종의 반신적(反神的)인 지식이 낙원으로 인도함이 아니라, 파괴적인 문명의 길로 들어서게 한 것이다. 이는 악의 세력의 추종이요, 무한정한 그리고 절망적인 투쟁 속으로 추락하는 것이다. 결국 죽음의 권세에 굴복하게 된다. 여기서 인간은 살길을 찾아야 할 것이 아닌가 ? 인간의 낙원 추방 사건(창 2 - 3)이 카인이 세운 도시 문명과 살벌한 복수전쟁(창 4 : 17, 18 - 24)으로 복구되거나 승패가 가려질 수 없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인간의 욕망과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른 세대를 다시 낳는 일이다. 그리고 인간이 ‘야웨 하나님의 지식’에 대해서 성찰 하는 것이다 (G. 폰 라트, 창세기. 109 쪽 참조). 야웨께 첫 새끼와 기름진 것을 제물로 바친 해밸(아밸)이 카인에게 죽임을 당하였지만(창 4 : 4, 8), 아담은 카인의 계보(창 4 : 17 -24)를 제거하고, 다시 야웨의 이름을 부르는 셰트와 애노쉬를 낳아 하나님의 형상을 따른 아담 - 노아‘의 계보를 이루었다(창 4 : 25 - 26 ; 5 : 1 - 8). 기독교인이 교회적으로 이른바 ’아담의 원죄의 교리‘로 아담 - 노아의 계보를 등한히 하였지만, 아담이 예수의 선조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이 예수의 계보( 눅 3 : 23 -38)로 증언 되고 있다. 예수의 계보에 카인의 계보는 없다(눅 3 : 36 - 37 참조). 이는 야웨 하나님의 계시로 되어진 것이다.
지금도 세계인류는 민족과 문명을 초월해서 인간의 낙원(파라데이소스)를 향하는 반면, 인간의 유토피아( 그리스어 οὐτόπος 몽상의 세계)를 선동한다. 그러나 세계적인 문호들이 인류를 위해 마음 속 깊이 고뇌하고, 양심을 고백하며, 헌신하는 정신적 - 영적인 고향이 바로 창세기 에댄 낙원(창 2 -5)의 틀과 동기(動機)에서 비롯된 것을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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