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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흐 대홍수 심판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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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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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속에서 헌신의 침묵-

창세기의 노아흐의 이야기는 에스겔서 14 : 13 - 14절에서 (14) “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에서 나온다. 그러면 대홍수에서 ‘노아흐’만 살아야 했는데, 대홍수 심판에서 노아흐의 가족 8 명이 방주에서 구출된 것은 모순이 아닌가 ? 말씀은 의인 ‘노아흐’만 살 수 있다고 하시고, 그의 가족들까지 살 수 있던 것은 심판 선포의 모순이 아닐까 ? 그런데 이에 대한 답이 겔 14 : 21 - 23절에 보완되기는 한다, 즉 겔 14 : 22 “ 그러나 그 가운데서 피하는 자가 남아 있어 끌려 나오리니 곧 자녀들이라, ”고 한다. 그럼에도 정밀하게 살펴보면, 물론 범죄를 저지른 민족이 형벌집단으로 ‘대홍수 심판’을 받는다 해도, 의인이요 경건한 사람들은 거기서 제외되어 용서를 받아야 한다. 그래서 ‘노아흐’만은 의인으로 구원을 받겠지만, 그의 나머지 가족들은 ‘의인’이라는 말이 없다. 에스겔은 그의 제사장 경험을 통해서 성전참례의 제사법에 개인의 정결성은 다른 이에게 넘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경건한 부모가 그들의 경건에 힘입어 그들의 범죄 한 자녀들이 심판을 모면하게 할 수 있겠는가 ? 그것은 맞지 않다. 신명기 24 : 16절에서 범죄로 인한 아비와 자식 사이에 연좌 죄와 자기 공로를 남에게 돌리는 것은 무효화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에스겔 예언자 주위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 때에 경건한 부모들의 자녀들을 예외적으로 다루도록 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면, 심판 아래 도시에 남은 자들, 즉 가족의 연대라는 집단적인 이해를 적용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런 관점 역시 필연적인 하나님의 심판에 대립하며, 반대에 부딪힌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 하나님에게는 ‘이스라엘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이방의 경건한 사람들 노아흐와 욥에게서 ’의와 경건‘을 보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태고사에서 의로운 사람 ‘노아흐’ 역시 불의를 저지른 아들 ‘함’을 저주 할 수밖에 없었다(창 9 : 25 참조). 욥은 어떤 가 ? 욥도 그 아들들의 죽음 앞에서 무기력하였다(욥 1 : 18 - 19 참조). 따라서 의로운 삶을 살았던 사람이라 해도 부모들의 공로가 그의 자녀들에 대한 하나님의 보복과는 무관함을 보인다. 그리고 기존의 이스라엘의 하나님과의 계약과 지위는 완전히 무시당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자유일까 ? 아니다. 이는 오히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평등주의적인 원칙에 가깝다. 즉 하나님 통치에서는 죄를 지은 이스라엘이나 이방인이 같은 운명에 처한 다는 사실이다(겔 14 : 7 - 11 참조).그럼에도 심판 가운데 피하는 자, 남은 자가 끌려 나오며, 경건한 이들의 자녀들에 의해서 위로를 받는 것은 무엇인가 ?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의 행위이며, 그것이 그의 불의(不義)일 수 없다는 것이다(롬 9 : 14 - 16 ; 욥 40 : 2 -4; 42 : 1 - 6). 따라서 하나님 심판에 대해서 사람은 하나님을 비판하지 못하며, 그에게 복종하며, 잠잠할 뿐이다. 고통의 운명 속에서도 하나님과 만나면서 겸손히 헌신적인 침묵만이 하나님을 믿고 영화롭게 하는 삶이다. 노아흐와 욥은 그들의 ‘의’(義 )로 그들의 자녀들을 살릴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예기치 않은 결정, 즉 긍휼로 그의 자녀들을 심판에서 이끌어 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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