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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사자(使者)와 사백의 군사(軍使)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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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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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 석종


필자는 연합기독뉴스의 잦은 휴간(休刊)과 발송 중지 사태를 보면서 마음이 아프다. 실무자들의 고충이 오죽하랴. 그런 문제는 ‘연합기독뉴스’ 신문에만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한국 교회가 영성을 강조 하는 것만큼 신뢰를 잃었기 때문에, 더 이상 교회와 성경말씀이 그 힘을 잃었고, 교역자들의 ‘밥벌이’ 수단으로 전락하였기 때문이다. 어느 개신교 지도자의 배임과 탈세가 재판에 대상이 되어 초췌한 얼굴로 걸어가는 모습이 영상에 비취는 순간 양식 있는 기독교인들은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서 미국의 강해 설교자 존 맥아더 목사는 “교회는 성경을 잃었다”고 개탄했다. 교회가 성경을 잃고 ‘신이교주의’(新異敎主義)가 된 마당에 성경공부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 일찍이 F. 니이체는 교회의 삼위 일체 성부 성자 성신을 성부 성자 마귀(사탄)라 하면서 이미 기독교의 이단성(異端性)을 갈파했던 적이 있다. 현대 기독교가 입으로는 십자가 고통에서 나와야 할 성령(聖靈)을 말하면서 물신(物神)을 탐하는 죄악에 젖은 예배에 도취된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하나님, 주님과 성령의 도우심을 고통과 영적인 투쟁 없이 인간화 된 세력, 조직, 파당과 계급을 만들어 놓고 아전인수 격으로 하늘이 허락한 ‘거룩함’이라고 둘러대고 있다. 주위에 ‘교회 사업하는 사람들’은 입에 ‘밥’만 퍼 먹이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필자는 더 이상 ‘창세기 강해’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고 필을 놓고 싶다. 배운 게 성경 강해밖에 없기 때문에 계속 써 나가야한다면, 스스로 접겠다. 그러나 우리는 죄인들로서 위기의 나락에 떨어져도, 죄를 의식하고 하나님을 깨닫고 구원을 갈망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씨름하려는 열정을 포기하지 못한다. 내 안에 큰 마귀가 나를 쓰러뜨리려고 하든, 내 주위에 방해세력이 그리 하든, 나는 죄 속에서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쳐야 한다. 세상의 심판보다 하나님의 심판이 더 두렵기 때문이다. 이런 기구한 운명이 고대 족장 야아콥에게 경험되었다.
야아콥에게로 다시 돌아가 보자. 야아콥이 그의 장인 라반과 작별한 후, 각자 자기 길을 떠났지만, 야아콥은 여전히 20년 전 그의 형 에사우와 불화 관계로 피신해야만 했던 과거 일이 위기에 노출되어 있었다. 야아콥이 불법으로 그의 형 에사우에게서 장자 권을 가로챈 것과 그의 아버지 이츠하크를 속여서 장자의 축복 권마저 거머쥔 것이다(창 27 : 27-29.35). 그 후 그의 어머니 립콰는 에사우가 야아콥을 죽이려하는 계획을 알고, 야아콥에게 사촌형(삼촌이 아님) 라반에게 피신을 권유했으며, 쌍둥이 형제의 극에 달한 사투(死鬪)를 두려워 했다(창 27 : 41-42, 45). 결국 야아콥은 파단 아람으로 망명(亡命)을 하다시피 도망쳐야했으며, 에사우는 부모의 뜻과 명(命)을 어기면서까지 삼촌뻘 되는 이쉬마엘의 딸 느바요트의 누이 마할랏을 아내로 취하였다(창 28 : 9). 20년이란 긴 세월이 지났건만, 야아콥은 속으로 에사우 형이 애돔 세이르에서 북상(北上)하여 얍보크 강 근처에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20년 전 도망쳤던 아우 야아콥을 공격하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야아콥은 어디에서 왔는지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使者)들과 마주친다. 야아콥은 에사우의 사백 명의 무력세력 앞에서 두려워했지만, 그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 자기를 돕는 하나님의 세력이 있음을 알고 그 곳을 ‘하나님의 진영’ 곧 ‘마하나임’으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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