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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개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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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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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으로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동인으로 권력, 금력, 명예를 든다. 권력은 타인에 대한 지배로 자신의 뜻을 타인을 이용하거나 타인의 지배를 통해 이루는 힘과 구조라 할 수 있으며, 금력이란 재물을 자신의 뜻대로 사용할 수 있는 상태와 그 크기를 말한다. 명예란 지위나 명성으로 인한 존경과 칭찬의 상태를 일컫는다.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정치나 군력투쟁을 통해 경쟁자를 누르고 자신이 목표하는 위치에 다다르려 한다. 금력과 부를 추구하는 사람도 다양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여 이를 마음데로 사용하며, 부를 기초로 타인을 지배하거나 특정목적으로 재물을 사용하려는 자세를 갖는다.
신약성경에서 대표적으로 부자를 든다면 아리마대 요셉과 삭개오를 들 수 있다. 삭개오(Zacchaeus)는 여리고성의 세리장(세무서장)으로 키가 작았다. 그의 이름은 ‘순결’이란 뜻이다. 아마도 그는 이름과 달리 부정 축제 등으로 큰 부자가 되었으며, 그의 직업과 그 시대 상황에서 동족의 이해와 사랑을 받기 어려웠을 것이며 오히려 그는 동족의 멸시를 받게 되었다. 그는 어느 정도의 권력과 많은 금력은 가졌으나 명예는 갖지 못한 상태였다. 예수님이 여리고 성을 지나가실 때에 삭개오도 군중들 틈에 끼어 예수를 만나려 했으나 키가 작음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마침 옆에 뽕나무가 있어 위에 올라가 예수를 보았다. 이때 예수님은 뽕나무 아래서 발을 멈추시고 삭개오를 불러 내려 그의 집에 묵어 가시겠다고 하였다. 예수님이 자신의 집을 방문한 그날 밤 삭개오는 예수님의 말씀에 감동을 받아 철저하게 회개하고 자기가 지금까지 축적한 재산 중에 남을 억울하게 한 것이 있으면 4배나 갚고,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다고 공언한다. 삭개오는 돈은 있어 부자이나 주변으로부터 질시와 냉대 그리고 민족배반자 등으로 비판을 받고 소외당하고 있는 그에게 예수님께서 방문하여 참 가르침을 제공한 것은 그에게 감동으로 다가 왔으며, 거듭나는 축복을 얻게 되었다.
자본주의 시대의 우리 사회에는 배금주의와 물질만능의 맘몬니즘 (mamonism)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거의 지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유전무죄 무전 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는 이를 나타낸 세속어가 되었으며, 돈이면 안되는 것이 없다란 생각이 팽배해 있다. 이런 현상은 경제계와 시장은 물론 일상의 삶과 교육, 종교계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교회에서도 물질주의가 힘을 얻고 있음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헌금으로 신앙을 평가하며 교회크기와 신도 수로 목사의 능력을 평가하는 일은 일반적이기도 하다. 불균형 성장을 유지해 온 우리 사회와 과거 정책기조에서 우리는 이런 물질주의에 길들여져 있으며 오히려 하수인이 되어 있지는 않는지 의심하게 된다.
이러한 물질주의와 바알주의(baalism)는 한국기독교와 교회를 오염시키고 오도하는 중대한 원인이다. 야훼신앙을 가진 이스라엘이 망한 것은 바알신앙 때문이며 바알주의의 매력은 자연의 풍요와 연관되어 있으며, 풍성한 제의와 현실에서의 물질적 풍요로움과 물량주의는 우리 사회와 교회를 오염시키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훼 하나님을 애굽 땅에서 인도해내신 역사의 구원자로 섬기면서, 한편으로는 풍요로운 농사를 위해 바알을 따라가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바알숭배와 야훼신앙을 공유할 수 있었다고 잘못 생각했다.
십계명의 정신, 산상수훈과 주기도문의 가치를 경제적, 재물의 관점에서 설현하는 중요한 모델로 우리는 삭개오를 들 수 있다. 오늘 날 우리들은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보다 ‘쌓아 놓을 양식, 무한대로 증가하는 양식’을 위해 기도하고, 그리고 그 힘으로 ‘남을 지배하고 정복하는 양식’을 얻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성도된 우리 모두가 삭개오처럼 예수님의 사랑으로 이웃과 나누고 부당하게 얻은 재물을 내어 놓는 다면 우리사회는 근본적으로 바뀔 것이다. 물질을 극복하고 지배할 때 참 자유가 올 것이다. 성도들이 삭개오와 같이 개인적 차원에서 청지기와 나눔의 노력을 지속하고, 사회적, 구조적 차원으로 공동체성을 회복하여 타자(他者)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실현하는 것이 물질 지배의 사회에서 우리가 조금은 자유를 누리고 더불어 살며 더 나은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어 나갈 수 있는 근본적 방법인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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