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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전 교수 - 장수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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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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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16.>

장수유감

 

오래 산다는 것은 예로부터 복이라고 여겼다. 실제로 인간이 복으로 생각하는 것 가운데 장수가 중요한 것도 사실이다. 언젠가는 죽음에 이르는 길을 가야 한다는 전제로 생각하면 죽음은 결코 복일 수 없다. 따라서 누구도 그 길을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또한 그 길은 미지의 길이고, 그 과정이 두렵기도 하다. 게다가 그 길은 혼자만 가야 하는 길이기 더 그렇다. 누구도 함께 갈 수 없고, 원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함께 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길이다.

한데 요즘 우리의 현실은 과거에 비해서 비약적으로 수명이 길어졌다. 따라서 사람들이 원하는 기대수명 또한 길어졌다. 이제 남녀를 막론하고 80세를 훌쩍 넘는 기대수명을 말하고 있다. 실제로 평균수명이 80세를 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여 요즘은 회갑(回甲)이나 고희(古稀)연을 하는 것이 겸연쩍다. 회갑을 한다고 하면 이상하다고 할 만큼 쑥스러운 일로 여긴다. 그만큼 수명이 길어짐으로써 환갑(還甲)이 갖고 있는 의미가 퇴색된 의미인 게다. 이미 우리 사회의 평균수명이 80세가 넘은 상태이기 때문에 굳이 환갑연을 한다면 이제는 80세쯤에 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요양병원 중환자실을 경험하면 장수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사실상 의식이 없는 중환자들이 연명을 위한 치료를 받고 있다. 소생의 가능성이 없지만 연명을 위한 의학기술이 발전한 까닭에 호흡과 심장이 지속되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요양병원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산소 호흡기를 부착하고 있다. 심장 기능에 문제가 생기면 심장기능을 회복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한다.

그런 상태로 연명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장수와 평균수명이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생활수준이 높아지므로 영양공급이 좋아졌고, 보건위생에 대한 의식이 좋아지므로 건강을 위한 자기관리가 되면서 수명이 과거보다 많이 길어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평균수명을 계산할 때 연명치료를 몇 년씩 하다가 별세하는 사람들이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것 아닌지. 현실적으로 몇 년씩 요양병원 중환자실에서 사실상 연명만 하고 있는 환자들이 침대가 부족해서 입원을 대기하고 있을 정도로 많다는 사실이 이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한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사회가 갖게 되는 새로운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고 의술을 갖고 있으면서 연명을 위한 치료를 무조건 거부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반면에 기술이 있으니까 무조건 노인성 질환으로 의식을 잃은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연명치료를 해야 한다는 것도 답답한 일이다. 그것은 의식이 없고, 회생의 가능성이 없는 환자에게도 엄청난 고통이고, 마찬가지로 가족들에게도 고통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참 어려운 이야기다. 인간의 생명을 존중해야 하는 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도리이다. 또한 그 생명이 하나님의 형상을 담고 있는 유일한 존재로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별세의 길을 가는 인간의 모습은 아름답다고 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누구든 예외 없이 그 길을 가야 한다. 우회할 수 있는 방법도, 대신 갈 수 있는 방법도 없다. 그 길은 각각 자신이 가야하며 반드시 혼자 가야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자신이 가야 하는 그 길을 예비하는 것은 산 자의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누구도 원하는 것이 아님에도 언젠가는 주어질 상황에서 스스로가 대비하여 사는 것이 현명하련만 당장의 현실에 급급한 것이 인생인 것도 현실이기에 안타깝다.

하여 그리스도인이라면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과 그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갖고 자신을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예외 없이 반드시 별세의 길로 가는 과정을 살고 있음에 그 길을 예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언제 어떻게 불림을 받을지 모르는 여정에서 어떤 순간이 닥치더라도 아름답게 자신의 모습을 마무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이들 가운데 누가 그곳에 누워있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그것은 결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그곳에 있어야 하는 현실이 모두를 힘들게 한다.

하니 별세에 이르는 길에 설 때까지 건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당면한 과제이다. 그러나 누가 건강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 전혀 원하지 않는 사고나 질병으로 인해서 그곳에 있어야만 하는 이들의 마음은 오죽하겠는가. 그럼에도 산자는 건강을 챙겨야 할 것이고, 동시에 언제 그렇게 될지 모르는 것이니 그 날을 예비하는 삶을 사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다.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자신에게 다가올 상황에 성실하게 준비된 자세로 임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임하는 자세가 아니겠는가?

그러한 의미에서 생각한다면 장수는 단지 오래 사는 것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에 충실하는 것이고, 그 현실에 최선을 다하여 임하는 것이 아닐까. 오늘이 없는 내일이 없듯이 오늘에 충실할 때 내일의 모습이 아름답고, 행여 어려운 상황이 주어질지라도 아쉽지 않다. 의지와 관계없이 누워야 하는 상황일지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단지 짐으로 남겨져서는 안 될 것이기에 자신에게 충실함으로 존경이라는 유산을 남길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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