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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가자, 이제는 집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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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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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가자, 이제는 집으로 가자

 

추태화 (안양대 기독교문화학과 교수)

 

영화 <집으로>는 서정적인데 참으로 복선이 많은 작품이다. 이야기는 단순하지만 곱씹어 볼수록 깊은 의미가 스며있다. 말 못하는 친정 어머니, 그에게 손주를 잠시 맡기러가는 도시의 젊은 미즈족. 철부지 아들은 외딴 산골에서 자신의 낯선 외할머니와 지내게 된다. 상반된 두 사람의 동행. 시골 외할머니는 정말 시골할머니 그 자체이고, 손주는 그야말로 ‘싸가지’ 없는 도시의 아이다. 어떻게 어울릴 수 있을까. 스토리라인은 그래서 어긋나 보이고 보는 내내 불안함을 감출 수 없다. 영화가 뭔지 의미를 전달할 수 있을까. 저렇게 좌충우돌하다 끝나지는 않을까.

그러다 손주가 읍내로 건전지 사러 나간다. 그만 집에 돌아가는 길을 찾지 못하고 어두운 산길을 헤맨다. 손주는 불안해진다. 이 길도 아닌 것 같고, 저 길도 아닌 것 같고... 손주는 울상이 되어 그저 산속을 헤메고 있다. 그렇게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누군가 등장한다. 외할머니다. 순간 손주는 모든 것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온 느낌이다. 한 순간 도시나 산골의 차이도, 길을 찾지 못해 불안했던 마음도, 산골에 스며든 어둔 저녁 노을도 지난 과거일 뿐, 소년은 그저 기쁘기만 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말도 못하고 꽤재재하고 재미없는 늙은 노파로 여겼던 자신의 외할머니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그 외할머니는 자신의 구원자로 나타난 것이다. 손주는 어두워져가는 산골에 저 끝에서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할머니 품에 안겨 울음을 터뜨린다. 그리고 그냥 할머니, 할머니!만을 외친다.

<집으로>는 작게는 한 인간의 모습을, 크게는 인류의 상황을 슬며시 감추고 있다. 우리 인류는 지금 집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나왔다. 읍내는 어느 문명의 지점. 낯설고 소외된 지역일 수 있다.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아직도 머물고 있는 타지일 수 있다. 여기는 인류가 머물고 있을 장소가 아니다. 인류는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지 못하고 우주에서 맴돌고 있다. 구원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지만 그 광활한 우주에서 인류의 목소리는 모기소리보다 크지 않다. 구원은 어떻게 이뤄지는가? 집에서, 꼬불꼬불 산길을 잘 아는 그 분이 오셔야 한다. 그 분이 먼저 집으로부터 오셔서 우리를 맞아주지 않으면 우리는 끝내 길 위에서 헤맬 수 밖에 없다. <집으로>는 인류가 돌아가야할 집, 본향, “내 아버지 집”(요 14:2)을 비유적으로 보여준다. 우리 인류는 돌아가야 한다. 길잃은 양처럼 헤매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주 예수는 우리를 집으로 돌아가게 하신다. 길을 찾지 못해 우왕좌왕 하는 인간을 맞이하러 오셨다. 우리를 어둔 산길에서 맞아 품에 안고 집으로 데려가신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그분 품에 안기는 것이다. 주저하지 말고 주님 품에 안기자. 할머니 품에 안기듯 그렇게 뛰어들어 평안의 주님 품에 안기자. 주 예수는 지금도 기다리신다. 집으로 가자, 이제는 집으로 가자!

 

추태화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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