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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의 시대에 중용지도(中庸之道)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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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명수 교수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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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의 시대에 중용지도(中庸之道)를 생각한다

 

어느 시대나 상반된 것은 있기 마련이다. 흑이 있으면 백이 있고, 좌가 있으면 우가 있다. 강경파가 있으면 온건파가 있고, 진보가 있으면 보수가 있기 마련이다. 하늘이 있기에 땅이 있고, 낮이 있기에 밤이 있고, 남성이 있기에 여성이 있듯이 이 세상과 인간사회를 구성하는 두 개의 축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이 둘은 본시 어느 것이 먼저라고 말할 수 없으며, 둘 사이에는 어떤 우열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하나를 배제하면 나머지 하나도 존립의 근거와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모든 영역에서 목격되는 이와 같은 이항(二項)은 결코 낯설지 않으며, 그 자체는 결코 나쁘지 않다. 이러한 이항을 우주적으로 확대하면 음양의 세계가 될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이항이 대립적 반목의 관계 속에서 작동할 때이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여러 분야에서 극단적인 대립과 대결이 계속되고 있다. 매일 뉴스를 통해 접하게 되는 정치권만 하더라도 여당과 야당이 대회와 타협을 통한 접점을 찾기보다는 당리당략에 치우쳐 국민적 요구를 외면하고 있다. 시급히 처리되어야 할 법안들, 수년째 국회에 계류 중인 법안들이 수두룩하다. 모두 현장의 필요에 의해 발의된 것들이지만 심의조차 되지 않아 자동폐기 되고 말지도 모르는 법안들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여야는 극한 대립을 계속하고 있다. 이러한 대립양상은 정치권의 문제만은 아니다. 우리사회 구석구석에 독버섯처럼 뿌리를 내리고 있다. 흑백논리가 횡횡하고, 이념적 갈등이 증폭되고, 이런저런 인위적인 연결고리에 의해 엮인 패거리 정치가 공동체의 분위기를 혼탁하게 만들고 있다. 그럴 때마다 눈살을 찌푸리지만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게 되는 것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욕하면서 따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한 부정적 학습과 반복은 국민정서에 치명적인 독이 된다. 청소년 교육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럴 때 우리 기독교인들의 사고와 처신은 어떠해야 하는가? 성경의 가르침대로 하면 된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뒤를 이를 지도자로 여호수아를 세우시면서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라”(수1:7)고 말씀하셨다. 한마디로 말하면 극단을 피하고 정도(正道)를 걸으라는 것이다. 이 정도는 곧 중용지도(中庸之道)를 의미한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바른 길을 의미한다. 그런데 종종 중용을 산술적 중간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분명한 자기 입장이나 소신 없이 눈치껏 중간에 서는 것을 중용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느 쪽으로부터도 비난을 받지 않고 정당히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고 지키려는 보신주의를 중용지도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본래 ‘중’(中)의 형상적 의미는 장대에 매달린 깃발이다. 깃발을 매달고 있는 장대는 어떠한 경우에도 스스로 위치를 바꾸거나 옮겨 다니지 않는다. 제자리에서 중심을 굳게 잡고 서 있어야 한다. 반면 장대에 매달린 깃발은 바람의 방향을 따라 펄럭인다. 바람의 방향에 역행하여 펄럭이는 깃발은 없다. 이처럼 자기의 근본을 분명히 하되 바람의 방향에 정확히 반응하는 것이 깃발이다. 중용지도를 ‘권도(權道)’라 부르기도 한다. 여기서 ‘권’은 세력이나 권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저울을 의미한다. 저울대에 올려진 것의 무게에 따라 저울추는 좌우로 예민하게 움직이다 최적점에서 균형을 이룬다. 가벼운 것이 놓이면 안쪽으로 이동하고, 무거운 것이 놓이면 바깥쪽으로 이동하여 최적점을 찾는다. 산술적 중간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최적점을 찾아 중심을 잡는 것이다. 중용지도는 활쏘기에도 비유되기도 한다. 화살이 과녁을 향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날아가 맞추는 것을 적중(的中)이라 한다. 과녁의 거리에 따라 활시위를 당기는 힘과 각도, 그리고 호흡이 조정될 때 적중이 가능하다. 중용지도란 바로 이런 것이다. 상황에 맞게 처신하되 적당히 중간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자기 입장을 가지고 양극단을 잡아 균형점을 잡는 것(執箕兩端집기양단)이고, 자기 처지와 분수에 맞게 행하는 것(素位而行소위이행)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가르침이며, 이 시대 기독교인들, 기독교 지도자들이 걸어야 할 길 아니겠는가?!

 

서명수 교수/협성대학교 신학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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