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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영적 권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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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영적 권태!

 

추태화 (안양대 기독교문화학과 교수)

 

 

무대는 황량하다. 나무 한 그루, 그것도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고목같다. 그렇다고 줄기도 억세 보이지 않는다. 물기가 채 오르지 못하여 말라가는 형상이다. 비틀어지고 처량하다. 바위 하나. 그리고 벤치. 앉을 마음이 들지 않는 먼지 풀풀 날리는 의자다. 엉덩이라도 갖다대면 삐걱거릴 것 같아 보인다. 아귀가 맞지 않는 형상이다.

등장인물들이 이런 무대에서 할 수 있는 행동은 별로 없다. 무언가 말을 하고 서로 소통하려 하지만 그 말은 잡음이 되어 연기처럼 사라진다. 무대 조명등에 비친 주인공들의 얼굴은 초라하고, 형색은 남루하다. 나무에 기대지도 못하고, 의자에 앉을 수도 없다. 그들이 보이는 행동은 불안하고 초조하다. 간신히 뭔가 의미있어 보일 듯한 말이 들린다. 그들의 대사 중에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다. ‘당신, 누구를 기다려?’ ‘나? 누군가를 기다리지.’ ‘그 누군가가 누군데?’ ‘나도 잘 몰라.’ ‘기다리는 사람 이름이 뭐야?’ ‘그이가 이름이 있었던가? 아, 참. 뭐라더라.. 고도라고 하던가?’ ‘고도? 별 희안한 이름이네. 고도가 누군데?’ ‘나야 알 수 없지.’ ‘알 수 없다는 이를 기다려, 당신은?’ ‘뭐, 그냥 기다리는 거지.’ ‘우스운 사람이네, 알지도, 올지도 모르는 이를 기다린다니.’ ‘그이가 고도라고 하니까, 올지도 몰라.. 혹 안 올지도 모르지...’

극은 그렇게 진행된다. 관객에게 정확하게 전달되는 메시지는 무대만큼 몽롱하다. 다만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누군가를,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것. 무의미해 보이는 행동 사이사이에 들리는 이름은 ‘고도’. 그런데 그 고도의 정체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올지 안 올지도 모른다. 모든 게 막연하다. 연극 중에서도 이런 플롯으로 진행되는 작품을 부조리극이라 부른다. S.베케트는 <고도를 기다리며>를 집필했고, 이 작품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현대인들은 깊은 권태에 빠져있다. 일상과 노동 사이에서 시계추처럼 오가는 생활, 문명시대라 불리 우는, 그러나 인간이 거대한 톱니바퀴의 한 부속처럼 느껴지는 현실 속에서 실존감각을 상실해간다. ‘나는 누구인가’ 인식하지 못한 채 하루하루 살아간다. 작가의 치열한 시선은 기독교 문명의 유럽을 향한다. 신앙은 살아있는가. 살아있는 신앙은 오늘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예수 승천 후 이천 년 세월이 지나간다. 재림하신다던 구세주는 아직 오지 않았다. 기독교인들은 서서히 권태에 빠져든다. 과연 구세주가 오기는 하는 것일까. 현실은 무대처럼 황량해 보인다. 기다리던 사람들은 하나 둘 인내심에 바닥을 드러낸다. 더 이상은 참지 못해. 아, 목말라. 답답해, 정말 그가 오기는 하는 것일까.

모세가 떠난 사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참지 못했다. 기다림에 지쳤다. 우상을 만들어 그 앞에서 놀았다. 부조리극과 다르지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영적 권태는 믿는 자들을 유혹한다. 주 예수님 말씀하신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마 26:41, 막 14:38, 눅 22:46)

 

추태화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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