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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은 광야와 같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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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은 광야와 같은 곳이다.

 

애굽을 떠난 후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 이스라엘은 광야를 거쳐야 했다. 출애굽 사건 후 곧바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12 정탐꾼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불신함으로 더더욱 그랬다(민14장). 이에 노한 하나님은 출애굽 1세대를 광야로 내몰아 40년 동안 살게 하면서 이들을 모두 광야에서 죽게 했고 출애굽 2세대를 훈련시킨 후 가나안으로 인도하기로 했다.

광야에 사는 동안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잘 돌보았다. 모세는 이에 대해 말했다.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신8:4-6절)

국역 성경에서 ‘징계’로 표현된 원어는 본래 ‘훈련’이란 의미를 갖는다.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훈련을 받아야 했다.

이에 대해 모세가 더 설명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8:2-3절)

결국 광야 삶은 두 가지 목적을 띤 훈련과 연단이었다. 첫째 그 마음을 시험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지 여부를 알고자 함이었다. 둘째 사람이 떡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줄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이 두 목적을 위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늘 낮추었다. 그 방법은 어려움과 고난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광야에서 어려움에 처하게 했고 그리고 곧 그 어려움을 풀어주었다. 하나님의 양동(兩動) 작전이 바로 훈련 방법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편이면서 동시에 대적이었다. 이 방법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믿음의 진실성 여부를 알기 원했고 동시에 선민 이스라엘은 떡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수 있음을 가르치고자 했다.

애굽은 농업에 기반을 둔 정착 사회였다. 그러나 죽음의 땅 광야에선 이스라엘이 비정착 사회를 구성하며 살아야 했다. 애굽에선 인간의 노력으로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는 곳이었다면 광야에선 인간의 노력만으로 불가능했다.

애굽인들은 자신의 노력과 땅에 의존하며 살았지만 광야에선 하늘과 신(神)에 의존하며 살아야 했다.

이렇게 광야는 이스라엘이 애굽의 인본주의적인 삶과 사고의 방식을 버리도록 돕는 아주 훌륭한 훈련 장소였다. 유감스럽지만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훈련을 잘 받지 않았다. 번번히 이들은 실패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했다. 하나님 자신이 세운 계획을 위해서였다(출32:11-14, 겔20:9절). 그 덕분에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살게 되었다. 그곳에 이스라엘도 애굽인들처럼 정착 사회를 이루었다.

그러나 가나안 세대는 광야 훈련을 받을 방법이 전혀 없었다. 유일한 방법은 가나안에 살면서 광야에 사는 것처럼 스스로를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정착 사회에서 살면서도 비정착 사회에 사는 것처럼 행하는 것이었다. 가나안 세대에게 모순(矛盾)된 삶의 방법이 발견되었다.

이 삶의 방법은 이스라엘의 조상 때부터 있어 왔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11:8-10절)

아브라함, 이삭과 야곱은 가나안 땅에 살면서 이미 정착해 사는 이방인들과 함께 살았다. 이들에게는 이를 가능케 할 정도로 충분한 부와 재물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정착 삶을 피하고 비정착 삶을 택했다. 그 이유와 목적은 하나님이 경영하고 지을 터가 있는 성을 바랐기 때문이었다.

보통 정착민은 부(富)를 창출해 주는 공간(空間)에 의존하며 산다. 그러나 유목민 같은 비정착민은 공간이 아닌 시간(時間)에 의존하며 산다. 항상 이동하기 편하게 살아야 한다. 이동 시기를 놓치면 그만 풀을 찾지 못해 목축은 물론 결국 사람 목숨까지도 다 잃게 된다. 그러나 가진 것들이 너무나 많으면 이동하기가 너무나 힘들다(히12:1-2절). 비정착민은 정착민들과 달리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릴 줄 안다.

 

비슷한 일이 가나안을 정복한 이스라엘에게 일어날 것을 모세도 미리 알았다. 그는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경고했다. “내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신8:11-14절) 그리고 그는 마침내 이렇게 예언했다. “내가 알거니와 내가 죽은 후에 너희가 스스로 부패하여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길을 떠나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너희의 손으로 하는 일로 그를 격노하게 하므로 너희가 후일에 재앙을 당하리라 하니라”(신31:29절)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 정착 사회를 이루며 살게 되어도 비정착민 같이 살아야 했다(렘35:1-10절). 이것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늘 명심하고 스스로 훈련해야 할 중요한 과제였다. 즉 이성이 아닌 믿음으로 사는 훈련을 가나안에서 스스로 받아야 했다.

하나님도 이를 돕기 위해 가나안에서도 양동(兩動) 작전을 펼 것이다(신11:10-17절). 그 목적은 그들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는 의지 여부를 알기 위함이며 정착 사회에서도 사람이 떡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수 있음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김현석 목사/ 순복음소망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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