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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부산행”, 흥행의 근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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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부산행”, 흥행의 근거?(1)

 

추태화 교수(안양대 기독교문화학과)

 

 

2016년 문화계에 뜨거운 이슈, 그야말로 대박친 사건이 있다면 단연 “부산행”일 것이다. “비나리는 호남선”이 즐거운 대중음악 가운데 히트에 히트, 그리하여 국민애창곡 반열에 오를 정도의 노래라면, 부산은 여러 면에서 문화 콘텐츠를 제공한 대명사임에 틀림없다. 예를 들면, 영화 “친구”, “해운대”, “국제시장”, 노래 “돌아와요 부산항에” 등이 그랬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부산행”에서 정작 부산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만 관객을 불러모은 괴력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많은 평자들이 이 영화를 뜨게 만들었던 이유로 “한국형 웰메이드 좀비영화”에 방점을 찍었다. 좀비는 영화에서 이미 식상할 수 있는 소재가 될만큼 ‘써먹은’ 내용이지만 그간 우리나라 영화에서는 좀처럼 다뤄지지 않았다. 일종의 처녀지를 개척한 공로가 인정된 셈이다. 여튼 어느날 갑자기 좀비의 습격을 받은 사람들이 좀비가 되어 또다른 선량한 시민들을 공격하는데, 그것도 무차별적으로 좀비에 의한 좀비의 재생산, 좀비의 악순환, 좀비의 확대재생산이 눈앞에서 펼쳐진다. 여기에 관객의 무의식이 자극받고 증폭된다.

신자유주의를 외치며 달려오던 한국, 기업친화적 정책을 주도해온 정치인들로 인해 민생은 험란해지고, 삼포, 오포, 칠포가 입가에 맴돌더니 급기야 헬조선이란 자조적인 신조어가 등장한 현실. 관객들은 어쩌면 부산행 열차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광란의 정글에서 그런 헬조선을 오버랩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상하게 고전을 인용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찍이 연극의 카타르시스를 간파했는데, 바로 그 억눌린 악몽의 잠재의식이 배설되고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좀비는 - 이 부분이 참 말하기 어려운 대목인데 - 천기누설의 압박감으로 표출하자면, 광란의 현실 속에 그대로 노출된, 신자유주의로 인한 자본주의 폐단 속에 그대로 내던져진, 약육강식의 피튀기는 무한경쟁 밀림 속에 내몰린, 그래도 주권을 가지고 있다 자부하는 고고한 시민, 그 국민이 처참하게도 좀비로 변질되어 가는 실존 속 자신을 생생하게 동일시하고 있다는, 그런 기호가 숨겨져 있지는 않았을까.

천만 관객의 발길, 천만 관객의 심장이 영화로 부르짖는다. 관람은 결코 피동적이지 않다. 관람은 능동이며 역동이다. 여기에 역설의 묘수가 있다. 백성은 좀비가 아니다. 우리는 결코 좀비가 되지 않을 것이다. 비록 현실이, 자본주의의 치명적 바이러스가 우리는 변질시키려 위협한다고 해도, 백성은 결코 좀비가 되지 않을 것이다. 좀비로 변해 마구잡이 폭력을 휘두르는 난폭한 점령군이 온다해도, 백성의 역사는 열차처럼 도도히 전진해 나갈 것이며, 어두운 터널을 지나면 새 생명의 탄생을 기다리는 저 대지에서 또 다시 희망의 노래를 부를 것이다.

관객은 바보가 아니다. “지금은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양성우). 지금은 푸른 파도 넘실거리는 ‘부산’에 다다르지 않아도 좋아라. 좋은 것은, 다만 좋은 것은 우리가 서로 서로 어깨동무하고, 좀비와 싸우고, 소망의 땅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 그 약속 하나로 지옥같은 협곡을 건너고 있다는 불멸의 믿음, 그것이다. 대중은 관람으로 피서하지만, 민중은 내일을 향해 그렇게 나아간다. 비록 무더위에 비같은 땀을 흘릴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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