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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부산행”, 흥행의 근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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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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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부산행”, 흥행의 근거?(2)

 

추태화 교수(안양대 기독교문화학과)

 

 

영화가 관객을 끌어들이는 길은 다양하다. <부산행>이 관객을 유혹한 또 하나의 떡밥을 든다면 불안과 공포라 하겠다. 인간 내면에 웅크리고 있는 이 심적 상태는 기독교적으로 이해하자면 죄와 깊은 연관이 있다. 인간이 원죄로 인하여 그 순수하고 행복한 에덴에서 추방당했을 때 보따리와 함께 가지고 나온 것이 상처난 마음이다. 하나님은 물으신다. 내 사랑하는 사람아, 네가 지금 어디 있느냐. 인간은 당시 당당히 대답하지 못하고 나무 뒤로 숨어버렸다.

뭉크의 그림 “절규”가 보여주고 있듯, 그 어떤 불안감에 몸서리치고, 막연한 공포심에 전전긍긍하는 모습이다. 이 병리적 현상은 약육강식이 횡행하는 현대 사회에 들어와 한층 고조되고, 제대로 치유받지 못한 영혼은 좀비처럼 중심을 잃은 채 기우뚱거린다. 바이러스에 한번 감염되면 회복 불가능해 보이는 불치의 상태가 현대인이 살아가는 공간, 에덴 밖이다.

열차는 달린다. 삶은 열차처럼 앞을 향해 달려나간다. 이 공간은 한쪽에 좀비라는 위협이 도사리고 있고, 매순간 멀쩡한 사람을 공격한다. 열차가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동안 그 안에서는 숨막히는 전쟁이 벌어진다. 또다른 좀비를 생산하기 위해 무작정 덤비는 공격성, 그에 대항해 인간의 품위를 지키려는 피끓는 사투. 한쪽에서는 이웃을 희생시켜가며 살고자 하는 자들이 꼼수를 발휘하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이웃을 살리고자 하는 자들이 대비된다. 세기의 끝, 종말에 나타나는 풍경이다. 마지막까지 인간이기를 자처하는 이들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 이웃을 살리고자 한다.

좀비 바이러스의 끝은 파괴, 파멸. 생명을 오염시켜 죽이려는 악마적 본능이다. 이에 저항하는 힘은 진정한 휴머니즘, 사랑과 희생, 인간 안에 내재되어 있는 조용하고 부드러운 영혼이다. 힘좋은 젊은 운동선수들, 군인들, 시민들마저 바이러스에 감염되고마는 냉혹한 현실 속에서 희망의 기호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와 어린 소녀다. 역설의 신호. 연약한 생명이 그 무서운 악의 폭풍 속에서 살아나 소망의 노래를 부른다.

앞으로 달려가던 열차는 동력을 잃고 멈춰선다. 어느 시대에선지 역사의 열차는 멈춰설 것이다. 뒤에는 좀비떼가 달려오고, 앞은 어두컴컴한 터널이다. 터널 끝은 보이지 않는다. 그 때 달리 선택할 여지가 없다. 어두운 터널 속으로 돌진하는 것 외에는. 간절한 노래, 소망을 향한 영혼의 노래만이 불안과 공포를 물리칠 수 있다. 유약한 생명체가 가진 것은 가녀린 노래 한 소절. 다시 역설. 그 어린 새싹의 흔들림이 절대공포를 물러가게 하는 기도가 되었다니. 어느 때엔가 절대암흑의 터널 안으로 한줄기 빛이 새어들어온다. 종말이 지나고 그들을 맞이하는 환호성이 울린다. 이쪽의 악에서 저쪽의 선으로 나가는 길은 암흑의 터널을 관통해야 한다는 것. 관객들은 아마도 이런 종말론적 미학에서 종말론적 실존을 길어올리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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