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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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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우 목사와 떠나는 성경여행 - 요한복음 ④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요1:41

 

침례(세례)요한은 제자훈련의 진정한 모델이기도 했다. 그는 따르는 제자들을 자기 제자로 키우지 않고, 예수님의 제자로 키웠다. 그래서 그는 누구보다도 더 ‘자기 사명을 잘 완수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그는 제자들을 마치 상급학교로 진급시키듯 기꺼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로 보낼 각오가 되어 있었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그 분이 오신다”(36절)고 거듭 증언함으로써 함께 있던 두 제자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예수님을 따르게 했다.

요한복음 1:35-51은 그 첫 두 제자를 비롯한 제자들의 증언 부분이다. 두 제자는 자신들이 따르는 것을 보고 “무엇을 구하느냐?”(38절, What do you want?)고 물으시는 예수님의 질문에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Where are you staying?)라는 동문서답처럼 보이는 대답으로 참된 구도자의 자세를 보였다. 그들은 말씀 한 번 들어보겠다는 자세가 아니라 아예 보따리 싸서 따르겠다는 자세를 보인 것이다.

“와 보라”(39절, Come and see), 두 제자의 마음을 아신 예수님의 초청이 이어졌고, 그들은 그 날 예수님과 함께 밤을 샜던 것 같다(39절). 가끔 한순간에 진리를 깨달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진리는 한 순간에 깨달아지는 것이라기보다는 공동체 안에서 함께 생활하며 깨닫는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J.R.힐(Hill)은 “마태복음 16:13-20이 그들이 그 일의 충분한 의미를 그 즉시 깨달은 것이 아님을 암시해준다”고 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지체하지 않고 즉시 따랐다(37절). 일체 계산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그들이 평소에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렸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드디어 새로운 스승 예수님과 함께 하는 제자의 삶을 시작했다. 그리고 너무도 좋았기에 둘 중 하나인 안드레는 자기 형제 시몬에게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We have found the Messias)라며 그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던 것이다(41-42절).

한편 다음 날 “나를 따르라”(Follow me)며 다가오신 예수님을 만난 빌립(안드레 베드로와 같은 동네인 벳새다 사람)은 나다나엘에게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메시아)를 만났다”(45절)고 증언했다. 그러나 나다나엘의 반응은 매우 차가웠다. 나다나엘은 ‘나사렛이라는 별 볼 일 없는 동네 출신이라면 메시야와 전혀 격(格)이 맞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빌립은 “나사렛에서는 왜 못 나오냐?”며 논쟁하거나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백문 불여일견’(百問 不如一見)이라는 자세로 “와 보라”며 나다나엘을 이끌어냈다.

결국 무화과나무 아래서 진리를 찾고 있었으나 몰라서 믿지 못했던 나다나엘마저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49절)라는 고백을 하게 된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메시아에 대한 나다나엘의 이 고백은 베드로의 고백(마16:16)보다 앞선 멋진 신앙고백이다. 물론 신앙고백이 신앙의 마침은 아니다. 삶으로 이어져야만 한다. 그런데 그는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바돌로메일 가능성도 있고, 훗날 디베랴 바닷가에서 부활한 그리스도를 만난 제자들의 명단에 그 이름이 나오는 것(요21:2)을 볼 때 제자의 삶을 잘 이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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