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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나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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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우 목사와 떠나는 성경여행 – 요한복음 7

 

거듭나야 하리라

요3:5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였던 무리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을 보고 믿게 되었다. 믿음의 근거가 ‘표적’, 물론 표적이 믿음의 동기가 될 수는 있다. 문제는 표적 신앙의 목적은 ‘자기 행복 추구’일 뿐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켜 줄 정치적 메시아, 거저 신상 문제 해결자 정도로 믿었다. 마치 하나님을 자동판매기로 취급하는 기복신앙에 불과했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께서 그들의 인정과 믿음의 반응을 믿지 않으셨다(요2:24)고 했다.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는 표적신앙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요한은 그를 바리새인이자 산헤드린 공의회 의원이며 이스라엘 선생으로 소개했다. 6천 명당 한 명의 비율로 구별된 바리새인(‘바리새’라는 말이 ‘구별된’이란 뜻), 당시 약 5천 명 정도의 소수 정예자들로서 경제적으로는 중산층 정도였지만 율법을 준수하고 도덕적 수준이 매우 높은 ‘자칭 의로운 사람들’. 그 중 한 명이자 71명(대제사장 1명, 바리새인 30명, 장로 40명)으로 구성된 유대 최고 의회 기관인 산헤드린 공의회 의원이며, 율법에 정통한 이스라엘의 랍비였다는 것이다.

2절의 ‘우리’라는 표현과 11절과 12절의 ‘너희’라는 표현을 볼 때 종교지도자들을 대표했던 바리새 유대주의자, 니고데모는 조금도 나무랄 데 없는 고매한 도덕성과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충분히 성실성을 인정받고 존경받는 사람이었다. 그 니고데모가 행하신 표적을 보고 선지자로 여기며 진리에 대한 목마름으로 예수님을 찾아왔다.

요한은 그가 찾아온 때가 ‘밤’이었다고 했다. 타인의 이목을 두려워했다는 것일까? 아니면 사람들의 간섭을 받지 않는 시간대를 잡아 친밀하게 긴 대화를 나누려 했다는 것일까? 그보다는 니고데모의 영적 상태를 가리킨다는 해석에 더 무게감이 느껴진다. 밤은 진리와 거리가 먼 혼돈의 상태, 이 세상의 혼돈을 상징하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의 세계와는 정반대, 그렇다면 니고데모는 성실하게 신앙생활하고 있었으나 영적으로는 ‘생명이 없는 어두운 상태’, 다시 말해 ‘영적 소경’과 같았다는 말이다.

최고 지도층이었지만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깍듯이 예의를 지켰다(2절).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이라며 거의 아부에 가까운 인사를 드렸다. 그런데 니고데모의 영적 상태를 꿰뚫고 계셨던 예수님은 “거듭나야 한다”(You must be born again; 3,5,7절)고 세 차례나 단도직입적으로 문제의 핵심을 찌르셨다. ‘거듭남’(ἅνωθεν 重生, radical rebirth)은 요한이 즐겨 쓴 단어로 ‘위로부터’와 ‘다시’라는 의미가 있다, 니고데모는 즉각적으로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는 것이냐”(4절)는 유명한 오해의 코멘트를 날리며 유대교의 한계를 드러냈다.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거듭남’(ἅνωθεν)을 풀어서 설명하셨다. ‘물’과 ‘성령’은 이미 널리 알려진 해석은 요한의 회개와 침례(세례)를 연관했으나 김세윤 박사는 회개는 육의 세상을 부인, 회개하고 윗 세상의 힘 곧 성령에 의해 새롭게 나는 것이고, 물은 침례시 성령의 상징이라며 두 개가 하나의 개념이라 했다. 거듭남이란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 구원의 정론(正論)이며 ‘소속의 변화’를 의미한다. 비록 니고데모가 유대사회의 명망가이며 성공한 부자였지만 영치(靈痴)라는 사실을 안 예수님은 그에게 가장 필요한 ‘생명’을 주려고 도전하셨다. 진리보다 편한 곳을 찾는 현대인들도 꼭 들어야 할 말씀이다. “거듭나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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