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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의 기독교- 교회와 교회와의 전쟁?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비텐베르크(Wittenberg) 대학교의 성서학 교수 마틴 루터(Martin Luther)에 의해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을 때, 기독교 세계가 갈라지고 양 진영은 30년 동안 치열하게 전쟁을 치렀다. 세상의 로마교회의 권위는 실추되었고, 교황은 세상의 종말이 다가왔다며 탄식하였다. 유럽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교회를 떠났다.

루터의 종교개혁에 반기를 들고 만들어졌던 예수회는 일본을 도와 임진왜란을 일으키는데 깊숙이 관여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명나라를 정복하겠다는 야심을 드러냈을 때, 예수회 신부들은 스페인 정부에 일본을 도와달라는 편지를 보냈고, 포르투갈의 군함과 승조원 제공을 요청했다. 예수회 신부 세르페데스(Gregorio de Céspedes)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조선을 침략할 때 최측근에서 그를 보필했다. 그런데 당시 중국의 명나라에는 예수회의 마태오 리치가 황실의 두 왕자와 친분을 나누며 중국을 돕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고 있었다. 예수회의 한쪽은 일본의 편에서, 또 다른 한편은 중국 명나라 편을 들며 조선에서 서로 전쟁을 벌인 것이다.

헌정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의 탄핵을 둘러싸고 한국 사회가 양분되었다. 한 쪽은 촛불을 들고 세종로에서 대통령의 탄핵을 외쳤고, 다른 한 쪽은 태극기를 들고 반대를 외쳤다. 양 진영은 생명을 아끼지 않을 만큼 목청껏 자신들의 주장을 외쳤다. 그 주장들의 각기 다른 외침 속에 정치적 전략이나 계략을 넘어서는, 신념에 찬 안타까움이 들어 있다. 신념과 확신에 찬 외침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신봉하는 양 진영의 기독교인들로부터 나왔다. 한국교회가 서울의 광장에서 서로 전쟁(?)을 벌였던 것이다.

1907년 평양에서의 영적대각성이 있은 후에 민족 과제에 대한 해결방법을 놓고 한국교회는 양분되었다. 한쪽은 국권회복과 민족의 자강을 얻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고 주장했고, 성령 체험을 신비주의로 비하했다. 반면, 복음주의자들은 국권회복만은 내세웠던 이들에게 죄에 대한 심각성과 속죄의 은총이라는 개념이 없음을 지적하면서 야웨 하나님이 역사를 주재하신다면서 그 분이 주시는 내적 힘이 오히려 강하다고 주장했다.

그때 일본은 양쪽 교회 모두를 향해 가장 “혁명적 집단”이라며 두려워했다. 양 교회 모두 ‘독립’이라는 절대 명제 아래 복음의 문제와 민족의 문제를 일방적으로 외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방식은 다르지만 일본에 저항하는 데에 기독교의 복음만큼 강력한 에너지가 없다는 것을 서로 인정했다. 상대의 주장에 귀를 기울였고 서로의 방식을 이해했다. 그래서 3.1운동 때에 민족지향의 기독교와 복음주의 교회가 함께 참여했고 민족을 이끌 수 있었다. ‘민족교회’라는 이름에 두 전통이 함께 공존하게 된 이유이다.

또한 한국 기독교는 대한민국의 독립과 건국을 견인했다. 민주주의 가치를 처음 전하고 계승하고 보존하였다. 그것을 위해 투쟁도 했고 눈물 뿌려 기도했다. 공산주의의 위협에서 대한민국을 생존시켰고 한국교회와 복음의 가치를 뚜렷이 보존하였다. 민족교회의 전통을 이어온 것이다.

광장으로 나갔던 기독교회는 이제 전쟁(?)을 멈춰야 한다. 방식은 달라도 복음은 나뉠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의 복음이라는 대 명제아래 상대의 이야기를 듣고, 한국사회의 통합을 주도해야 한다. 3.1운동을 주도하고 민족을 이끌었던 것처럼 또 다시 민족의 향도로 나서야 한다.

 

김명구 박사(연세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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