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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물을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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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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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우 목사와 떠나는 성경여행 – 요한복음 11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물을 주리라

요4:1-15

 

3장에서 정통 유대인이자 종교계의 거물인 니고데모를 만나셨던 예수님은 4장에서 너무도 대조적인 사마리아 우물가의 이름 모를 가련한 한 여인을 만나신다. 복음서의 기록자인 사도 요한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두 만남을 대비시키며 예수께서 인간적으로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이 여인을 구원하고 ‘사마리아의 복음’이 되셨음을 부각시켰다. 그것도 니고데모에게 제시했던 것과 똑같은 영생을 제시하심으로써 예수님은 종교적이고 도덕적이며, 지적이고 상식적인 사람을 찾기보다 ‘갈급한 사람’을 찾는다는 사실을 획기적으로 보이셨다고 강조했다.

요한은 예수께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실 때부터 흔히 유대인들이 택하는 요단을 가로질러 해안선을 따라 가는 길이나 베레아를 통해 우회해서 가는 길을 택하지 않고 굳이 통행기피지역이었던 사마리아를 통해 가셨다(4절, I MUST go through Samaria)고 했다. 당시 사마리아가 유대인들이 괄시하던 지역이었고,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이 아예 상종치 않던 사람들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의외의 선택이셨다. 레온 모리스는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급한 여행자는 사마리아로 통과하는 지름길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을 인용하며 4절의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를 ‘예수님의 사명의 성격과 하나님의 계획에 따른 긴급성’으로 해석했다. 예수님의 사마리아 통과가 단순한 지리적 이점 때문이 아니라는 말이다.

분열 왕국의 북쪽인 이스라엘은 BC 721년 앗수르에 의해 수도 사마리아를 점령당하며 귀족들은 포로로 끌려갔다. 남아있던 천민들과 평민들은 앗수르의 이방 민족과의 통혼정책으로 유대인의 순수성을 잃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로부터 개 취급을 당했고, 그들이 사는 땅조차 유대인의 통행기피지역이 되고 말았다.

몸이 피곤하셨던 예수님은 야곱의 우물곁에 지친 모습으로 앉으셨다. 여기서 쓰인 우물이라 단어는 샘(泉, a spring or fountain)으로 봐야 한다. 아마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물”(14절)과 연결하기 위한 단어 선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물의 깊이가 무려 30m나 됐다. 예수님은 나그네들의 쉼터인 그 곳에서 물 길러 온 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셨다.

제6시, 현대 시간으로는 정오, 아무도 물 길러 오지 않는 가장 뜨거운 시간, 그 시간에 물 길러 왔다는 것은 사람들의 눈과 손가락질을 피해 산다는 뜻이다. 아무도 없는 때를 택하였던 여인 입장에서는 낯선 유대인 남자를 만났을 때 놀라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경멸의 눈짓은커녕 정중하게 “물 좀 달라”는 태도에 의외라는 느낌이었는데 물을 달라고 부탁하던 분이 오히려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주겠다”(10절)고 했다. 반전이다. 스스로 ‘예언 성취자’(사35:7; 49:10)임을 드러낸 말씀이다. 하지만 이 여인은 더 이상 물을 길러 오지 않아도 되는, ‘이제는 고생 끝!’ 정도로 받아들였다. 단순히 ‘유대인 남자’로 보다가 이제는 ‘야곱보다 더 큰 이’로 보는 정도일 뿐, 여전히 예수님의 생수를 자기 인생을 편하게 해주는 수준 정도로 이해하고, 예수님을 문제해결사 정도로만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J.R.힐은 본문의 대화를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가로막혔던 장벽을 주저 없이 무너뜨린 것이자 사람 많은 곳에서는 여인과 인사를 나누는 것조차 금기시하던 랍비들의 관습도 무너뜨린 것”이었다며 “이는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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