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양용근 목사를 조명한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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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양용근 목사를 조명한다(13)
  • 연합기독뉴스
  • 승인 2019.01.16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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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한국교회 탄압과 굴복(1930년대)
양향모 목사

 

양용근은 1935년에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고 그 이듬해인 1936년에 광양읍교회 조사로 시무하기 시작하여 3년간 조사생활을 했고 1939년 목사안수를 받고 1943년 순교하기까지 5년간 목사로 시무했다. 길어야 8년이고 그나마 재판과정이나 수감생활을 빼면 짧은 기간 동안 목회를 하였다. 그러나 그가 신학을 시작하고 목회를 한 1935년에서 1945년 해방까지는 일제가 최후의 발악으로 교회를 핍박하던 시기였다. 이런 시기에 목회자가 되기를 자청하고 나선 것은 보통의 각오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1. 1930년대 일제의 한국교회 탄압

침략 전쟁기라고 분류한 1930년대의 일제는 국가지상주의로 중무장한 국가였다. 1930년대에 들어서 일제는 대륙침략을 감행하여 1945년까지 소위 ‘15년 전쟁’ 을 치른다. 이러한 장기간의 전쟁을 치르기 위해 일제가 만든 체제를 국가지상주의(國家至上主義) 체제라고 부른다. 국가지상주의란 말 그대로 국가가 가장 높은 가치를 갖는 체제이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지상주의 체제를 뒷받침한 것이 바로 천황제 이데올로기이다. 일제는 천황이데올로기를 통하여 국가를 가장 높은 자리에 올려놓고 식민지 조선 사람들을 일제에 충성을 다하도록 하였다. 이시기에 일제는 ‘심전개발운동’(心田開發運動)을 통하여 “일본은 만세일계(萬世一係)의 천황이 다스리는 나라”라는 것과 경신승조(敬神崇祖) 사상을 통하여 천황을 현인신(現人神)으로 섬기게 했다.

더 나아가서 일제는 ‘조선병참기지화정책’을 수립하여 어느 누구도 개인의 이익을 추구할 수 없고 오직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봉사하게 하였다. 그러나 조선인들은 자신들이 일본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소수에 불과하여 이런 정책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이런 소극적인 자세를 개선하기 위해서 ‘황민화 정책’을 수립하여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를 제정하고 신사참배와 황거요배 등을 시행하도록 강요했다.

교회는 이에 대하여 거부하거나 대항하지 않고 쉽게 수용을 하고 말았다. 1938년 5월 말 현재 현황에 의하면 많은 교회들이 이미 일제에 순복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국기 게양탑을 설치한 교회 88%, 국기에 대한 경례 96%, 국가봉창 82%, 동방요배 96%, 황국신민서사 제창 93%, 신사참배 55% 등으로 나타나 있다.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기 이전에 이미 많은 교회들이 신사참배를 수용하고 있었으며 동방요배 등의 국민의례는 대다수 교회가 이미 수용하고 있었다.

신사참배나 동방요배가 우상숭배라고 하여 반대하는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했고 대부분은 국가의식이라고 하여 수용을 하며 일제에 굴복을 하였다. 소수의 반대자들에 대해서 일제는 철저하게 응징을 하였다. 1925년에 제정한 ‘치안유지법’을 종교단체나 종교인에게 적용시키기 시작했다. 종교나 종교인이 종교를 빙자하여 국체에 맞지 않는 주장을 할 때 처벌하겠다는 것이다. 이 치안유지법에 의해서 천황숭배를 거절하고 신사참배에 참여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을 처벌하였다.

 

2. 한국교회의 굴복

이러한 일제의 교회 탄압에도 불구하고 1930년대의 교회는 성장을 멈추지 않았다. 교회의 수나 성도의 수가 늘어갔고 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나 각종 단체들이 많아지고 그 역량도 강화되었다. 일제는 계속해서 자기들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서 교회에 박해를 가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여러 가지 면에서 계속 성장하였다. 신사참배 강요라는 엄청난 위협 앞에서도 그 성장을 멈추지 않았고 심지어는 교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한 이후에도 교회는 계속 성장하였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교회가 일제의 압박에 대항하지 않고 굴복하고 타협을 했기 때문이며, 오히려 일제에 더 의지하고 협력을 하였기 때문이다.

1930년 당시 장로교회는 3천개의 교회가 35만이 넘는 성도들을 가지고 있었고 견고한 조직을 가지고 있었지만 일제에 대항할 힘을 가지지 못하고 그들에게 굴복하고 말았다. 교회가 국가와 대항관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국가의 제도를 의지하고 국가의 도움을 받아서 성장을 하였기 때문에 신사참배와 같은 불의한 요구에도 대항하지 못하고 협조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장로교회는 결국 1938년 9월에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국민정신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하에서 총후 황국신민으로써 적성(赤誠)을 다하기로 하였다. 장로교회는 1938년 7월 7일에 결성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에 이미 가입하고 있었으며, 장로교회는 전적으로 국가를 위한 봉사 기관으로 전락하였다.

1938년 9월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한 것도 일제의 강요가 주요 원인이기는 했지만 사실은 장로교회의 목사들이 치밀하게 준비를 했다.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총대들이 총회에 다 참석을 했고 격렬하게 반대하지도 않고 찬성했고 가결 후에도 스스로 일제의 정책에 참여했다는 것은 신사참배 반대의 의지가 없었던 사람들이 더 많았다는 증거이다.

 

양향모(광성교회 담임목사, 개혁주의목회자훈련원 원장, 양용근목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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