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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隨想) | 감리교 역사의 감독과 목사 이야기
박경진 장로(장로회전국연합회 회장)
2009년 03월 05일 (목) 12:01:46 연합기독뉴스 webmaster@ycnnews.co.kr


1980년 청주 3· 1공원에는 3·1운동 때 청주지역 출신으로 민족대표로 참여한 6명의 동상이 건립되었는데 거기에는 감리교 출신인 신홍식,·정춘수,·신석구 세 목사도 포함되어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금은 정춘수 목사 자리에는 동상 없이 좌대만 남아 있다.

정춘수 목사는 3.1운동 이후 193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민족주의 노선을 견지하였다. 그러나 1935년 흥업구락부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들어갔다가 나온 후에는 노골적으로 친일 노선을 걸어 일제말기 가장 대표적인 친일파 종교인이 되었다.

특히, 1940년 감리교 감독이 된 후에는 한국 교회를 일본교회 예속으로 추진하였고 1943년 소위 ‘혁신교단’이라는 친일교단을 조직하여 일제의 종교정책에 적극 순응하는 비굴한 종교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그는 군용비행기3대 기금마련을 위해 전국34개 감리교회를 폐쇄하기도 하였고, “설교는 일본말로 하라”는 지시를 따르지 않는 목사들을 파면, 혹은 휴직 처분하였다.

정춘수 목사는 명예에 혈안이 되어 서울을 중심으로‘유명세’를 타며 각종 종교, 사회단체 활동에 적극 가담하며 마침내 감리교회 제4대 감독의 자리에까지 올라 최고 명예를 누렸으나 해방이후‘친일파’로 교회 안팎에서 비난을 받고 마침내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는 비참한 수모를 겪었다.

마침내 그는 구금되어 있을 때 감리교를 이탈하여 천주교로 개종하였고 쓸쓸히 말년을 보내다가 1951년 고향에서 피난 중에 비참한 생을 마감하였다. 그 후‘역사 바로 세우기’운동으로 친일파 정춘수 동상마저 철거되는 등 후세로부터도 배척을 받는 인물이 되어 역사에 그리고 애국지사 33인의 명예를 더럽힌 치욕적인 인물로 정춘수 목사를 기억하게 된다. 정의의 심판을 통해 진리는 반드시 드러나며,‘무엇을 하든 처음보다 중요한 것은 마지막’이라는 가르침을 일깨워준다.


한편, 청주 3.1 공원에 있는 ‘눈물의사도’로 불리던 33인의 애국지사 신석구 목사를 기억해 본다. 신석구 목사와 정춘수 목사는 나이와 고향(청주)이 같은 친구목사이며, 특히 3·1운동 때는 정춘수 목사가 남감리회에서 먼저 민족 대표로 참여하였고 신석구 목사도 참여하도록 권하였다.

신석구 목사가 민족대표가 될 수 있었던 데는 정춘수 목사의 역할이 컸다. 그렇기에 고향친구의 변절을 누구보다도 가슴아파했고 어떻게든 그를 회유하여 명예욕에 빠져 감리교를 망치고 있는 친일행각에서 구하려고 애를 썼다. 신석구 목사는 진심어린 뜻으로 가족들에게는 한 번도 사 주지 못했던 쇠고기를 두 근이나 사가지고 집으로 찾아가 정춘수 목사에게 간곡히 권유를 하였으나 거절당하기도 하였다.

신석구 목사는 천안에서 신사참배거부로 일경에 붙들려 2개월 동안 구류를 살았고 수시로 예비 검속을 당해 유치장을 드나들다가 마침내 1945년 5월, 전승기원 예배 및 일장기 게양 지시를 거부하였다는 혐의로 구금되었다가 그 곳에서 해방을 맞았다.

신석구 목사는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북한에 남아‘비인간적인’공산당 정권에 맞서 투쟁하다가 1949년 4월 19일 반동 비밀결사를 조직했다는 혐의로 10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평양 인민교화소에서 복역하던 중, 1950년 10월 공산군의 창검에 의해 장렬한 순교의 반열에 올랐으며 창세에 빛나는 33인의 애국지사, 감리교회의 자랑스러운 목사로 기억된다.

위 두 분의 얘기는 오늘의 감리교회 사태에 시사 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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